“나 같은 피해자 더는 없기를”… 비동의강간죄 청원인 A씨의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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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없이 물건을 가져가면 절도인데, 동의 없는 성관계는 왜 강간이 아닌가요?”
비동의강간죄 청원인 A씨가 4일 여성신문과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A씨가 국회전자청원 홈페이지 국민동의청원에 올린 ‘억울한 흙수저 성범죄 피해자, 비동의강간죄 국회발의 통과 촉구에 관한 청원’은 지난 19일 동의한 시민이 5만 명이 넘어서며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됐다.
A씨는 성폭력 피해자다. 지난 2022년 12월경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B씨와는 두 번 만난 사이였고, 술에 취해있었다. “술에서 깬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성기가 아파 산부인과에 들렀더니 의사가 성폭력상담소를 연결해주었다.”
사건 발생 5일 후 A씨는 경찰을 찾아갔고, 경찰은 이 사건을 준강간으로 규정해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B씨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A씨는 2년간 재판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2심에서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A씨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A씨에게 돌아온 것은 무고죄, 명예훼손죄 등의 고소장이었다.
여성신문과의 통화에서 A씨는 “어떻게 법이 이러냐. 동의하지 않았다는데,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는데도 강간이 아니라고 한다”고 몇 번이나 호소했다. 2심 판결 이후 A씨는 세 차례 자살 시도를 했지만, 살아남았다.
“물에 몸을 던지는 게 아니라 사회에 몸을 던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A씨는 비동의 강간죄 제정 촉구 운동을 시작했다. 1인 시위를 하고, 국회의원을 만나러 다녔고, 국민청원도 하고 언론에 연락을 돌렸다.
“이런 고통을 누군가에게 또 물려 줄 수 없다. 다음 피해자가 나오는 것은 막아야 한다.” 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2023년 7월 25일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가 기자회견을 열고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하라'고 촉구했다. 참가자들이 강간죄로 인정받지 못하는 피해자들 사례가 적힌 피켓을 들고 '동의하지 않았다, 강간이다'라고 외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여성신문
“블랙아웃 경우 피해 입증 어려워”
형법 제299조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을 하면 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죄와 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이를 준강간, 준강제추행이라고 한다. 박수진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피해자가 깊은 잠에 들었거나, 술이나 약물로 의식을 잃은 상태 , 의식이 있어도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를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다고 본다”고 했다.
문제는 수면에 빠지는 의식상실인 ‘패싱아웃’이 아닌 술에 취해서 기억을 잃은 ‘블랙아웃’에서 항거불능 상태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우리가 술을 마신 경험을 돌이켜보면, 멀쩡히 집에 찾아와도 다음 날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멀쩡히 걸어가고, 집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장면이 포착되면 재판에서는 항거불능 상태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 CCTV 등을 통해 피해자의 걸음걸이, 말투, 성적 접촉이 이뤄진 방식과 정황 등을 엄격히 따진다. A씨의 경우도 “피해자의 걸음걸이가 다소 비틀거리고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 등 피해자가 다소 술에 취한 상태”로 보였음에도 “홀로 서서 보행했고”, “피고인과 동일한 속도로 보행”한 이유 등을 들어 재판부는 “항거불능 상태에 이르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그러다보니 피해자가 범행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일 때 가해자 상당수가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의 블랙아웃 상태가 인정될 때 가해자에 대한 무죄 선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2019년 전국성폭력상담소가 지원한 준강간 사례 가운데 가해자를 고소한 피해자 511명 가운데 유죄가 선고된 경우는 21%(112명)밖에 되지 않았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로 보기 어렵거나 블랙아웃이 인정돼 불기소, 무죄판결이 내려진 비율이 전체의 40%를 넘었다
“동의 여부로 강간죄 구성요건 변경해야”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술에 취한 피해자가 범행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형법 297조 강간죄가 적용돼 ‘폭행 또는 협박’이 없었다고 하고, 피해자가 범행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면 블랙아웃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준강간 피해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에 여성계와 법조계 등 일각에서 몇 년째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미투 운동 이후인 2019년 221개 시민단체가 모여 발족한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는 형법 제297조를 개정해 ‘피해자의 현저히 곤란한 저항’ 정도를 따지는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니라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 구성요건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 부소장은 “강간죄 구성요건이 동의 여부로 변하면 법체계 내에서 성폭력을 다루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 기대한다”며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되면 강제추행죄와 유사강간죄의 구성요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동의 강간죄는 세계적 추세
비동의 강간죄는 세계적인 추세다. 2023년 7월부터 일본은 한국에서 ‘강간’과 ‘준강간’에 해당하는 ‘강제성교죄’와 ‘준강제성교죄’를 통합해 ‘비동의성교죄’로 명칭을 바꿔 시행하고 있다. 해당 법은 폭행이나 협박뿐 아니라 술이나 약물 섭취, 수면 등으로 의식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오랜 학대를 당했거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경우 등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된 경우에 적용된다. 일본 외에도 미국, 독일, 스웨덴 등도 비동의 강간죄를 시행하고 있다.
한편, 비동의 강간죄 관련 법안은 20대 국회에서 10건, 21대 국회에서 3건이 발의됐지만 모두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지난해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강간죄 판단 기준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동의 결여’로 변경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출처 : 여성신문(https://www.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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